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더할 나위 없는 가을밤, 책을 읽었다ARTICLE 2020. 1. 9. 20:02
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일이 언젠가부터 고단함이 되었다.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사표를 쓸 날일까 마음속으로 재곤 했다.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다 오는 기분이었다.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들과 낮 시간 내내 돌보지 않은 집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잘 시간이었다. 아침에 다시 회사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누워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. 쉬고 싶었다. 할 수 있다면 속세와 단절되어 모두 잊고 푹 쉬고 싶었다. 그래서 서촌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. 서촌과 광화문은 지금으로부터 n년 전에, 내가 첫 대학에서 쓰라림을 맛보고 자퇴를 생각하던 시기에 다니던 곳이다.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바빠 스쳐갈 뿐 오래 머물지 않는다. 그래서 가장 붐비지만, 근심을 내려놓고 오기 좋다. 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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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의 은밀한 도시ARTICLE 2020. 1. 8. 19:01
오랜 기간 명절은 거의 혼자였다. 외할아버지, 외할머니, 할아버지가 이미 안 계셨고, 부모님이 휴일 없는 가게를 한 후로 명절 때 시골을 내려가거나 함께 모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. 어렸을 땐 아무도 없는 집에서 명절을 보내는 건 일종의 버티기였다. 연휴 마지막 날 쯤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날만 기다렸다. 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혼자 어디든 갈 수 있게 되면서 명절은 완전히 다른 날이 되었다. 여전히 텅 빈 집이었지만, 텅 비어서 좋았다. 집도, 길도. 연휴 첫날, 모두들 지방으로 가족을 만나러 간 그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어가곤 했다. 특히 경복궁역에서 광화문을 보고 똑바로 걷다가 광화문 광장이 나올 무렵 우회전할 때를 좋아했다. 차도, 사람도 거의 없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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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도 고전을 폈다ARTICLE 2020. 1. 6. 01:31
1. 한 권.. 두 권... 세 권... 네 ㄱ.. 세 권 반. 지난달에 읽은 책을 정리하다, 문득 막막한 기분에 빠졌다. 한 달에 네 권이라니. 저것밖에 못 읽었나? 알라딘 보관함을 봤다. '총 15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.' 읽고 싶은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'아직' 못 읽은 책이 157권이나 있다. 한 달에 4권이니, 이 추세면 39개월은 꼬박꼬박 읽어야 하는 양이다. 그 사이에 보관함에 얼마나 많은 책이 더 담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. 2018년 출판통계를 봤다. 56,809 종의 책이 출간됐다고 한다. 문학만 해도 13,346종이나 된다. 내가 5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하면(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지만), 한 달에 4권, 1년에 48권. 50년에 2,400권. 내 평생을 다해도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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좁은서재라고 불렀다ARTICLE 2020. 1. 5. 23:45
몇 년 전, 그러니까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이야기다. 서울이라곤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멜빵바지를 입고 63빌딩에 놀러 갔던 게 전부인 나는, 이 거대한 도시에 연고도, 친척도, 친구도 하나 없었다. 그리고 돈도 없었다.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 서울에 산다는 건 조금은 두렵고 우울한 일이지만, 새 출발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작은 모험심을 불러일으키는 설레는 긴장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. 하지만 서울에서 돈이 없다는 건, 어느 면으로 보나 좋을 게 없었다. 가진 돈을 탈탈 털어, 서울 변두리의 원룸을 구했다. 무척 작은 원룸이었다. 얼마나 작은지, 햄토리가 살면 딱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크기였다. 그러니 가구 혹은 가전제품은 필요도 없고, 사고 싶지도 않았다. 다만, 어릴 적부터 가지고 ..